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티오키아 공국 (문단 편집) === [[아제르 상귀니스 전투]] === 1117년 안티오키아 공국은 주변의 이슬람 소영주들을 흡수하며 영토를 확장했다. 루지에로는 아자즈 지방을 점령하고 주변 토착 기독교 촌락을 선무했다. 아직까지 알레포 영주 일 가지와의 동맹은 유효했지만 결국 1119년에 루지에로와 [[라틴 총대주교]] 베르나르도는 [[알레포]]로 향하는 관문인 아르타 성채를 점령하며 동맹국 알레포 영주 일 가지를 통수치고 말았다. 자신의 동맹자가 배신을 때리고 알레포를 습격할 것이 확실시되자, 일 가지는 [[다마스쿠스]]의 아미르 토그테긴을 위시한 영주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. [[라틴 총대주교]] 베르나르도는 튼튼한 성채인 아르타를 거점으로 다가오는 [[예루살렘 왕국]]의 대규모 지원군을 기다리자고 주장했지만, 루지에로는 통수를 치고 싶은 마음에 신중한 전략을 포기하고 알레포를 향한 강행군을 시작했다. 결국 두 군대는 쌍방 지원군을 받지 못하는 상태로 맞붙게 되었다. 안티오키아 공국의 병력은 700여 명의 노르만인 기사와 500여 명의 [[아르메니아 왕국]] 중기병 3,000여 명의 중보병, 거기에 상당한 수의 [[투르코폴레스]]가 포함되어 있었다. 일 가지의 병력은 추산하기 힘들다. 기록상으로는 4만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으나, 실제 그러했다면 겨우 5~6천에 불과한 안티오키아 군을 상대로 지원군까지 요청하며 후퇴하고있는 절박한 상황이었을 리가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. 역사가들은 실제 병력이 1만~8천 남짓한 병력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. 1119년 6월 23일, 밤이 되자 루지에로는 주변으로 진입하는 통로가 적어 포위하기 어려운 사르마다 지역에 진지를 구축했다. 하지만 일 가지는 현지 양치기들이 알려준 옛 길로 루지에로의 부대를 포위했다. 하지만 안티오키아의 장궁병들과 이슬람 용병 궁기병대의 화살비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, 진짜 비극은 다음 날인 24일 벌어졌다. 24일 아침, 두 군대는 회전을 벌였다. 전투 초반, 안티오키아 장궁병들의 탄막과 노르만 기사대, 이슬람 경기병들의 좌익 돌파로 전투는 쉽게 루지에로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. 하지만 일 가지의 알레포군은 돌파당한 상태로도 전열을 유지해 역습을 가할 타이밍을 벌었다. 일 가지의 궁기병들이 적의 후미로 기동해 피해를 입히며 혼란을 주자, 전투의 행방은 알 수 없어졌다. 전투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이슬람군도 십자군도 아닌 바로 모래바람이었다. 강력한 북풍이 안티오키아군을 덮쳤고, 기사들과 보병대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모래가 그들을 휘감았다. 보병 진열이 흐트러지자, 일 가지의 군대는 일제히 돌격해 안티오키아군을 섬멸했다. 루지에로와 안티오키아군은 말 그대로 전멸. 단 2명의 기사만이 탈출해 비보를 전할 수 있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